보스턴 테러가 터진 후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조하르란 이름이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차르나예프 형제 중 형 이름이 타멜란(26·사망), 동생이 조하르(19)다. 이 이름은 나를 체첸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1944~1996)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구소련에서 체첸이 배출한 유일한 공군장성(소장)인 그는 소련이 붕괴하자 체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94년엔 러시아가 침공하자 처절한 민족해방 전쟁을 벌였다.
그는 사생관이 뚜렷한 지도자였다. 러시아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이따금씩 기자회견을 했다. 1995년 초 한 신문이 “기자를 가장한 러시아 비밀정보원의 접근이 두렵지 않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나의 생명은 정보원이나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담한 행보를 계속했지만 그는 결국 이듬해 위성전화 주파수를 추적한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1994년 12월 체첸 공화국을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고 있는 두다예프 대통령
보스턴 마라톤대회 테러 용의자 타멜란 차르나예프(오른쪽)와 동생 조하르
생포된 조하르의 이름은 바로 두다예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형제의 아버지가 1993년 체첸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존경하는 체첸 독립투사의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형 타멜란은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한때 두각을 보였고, 조하르는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인정이 많았다. 온건하고 지적인 점이 두다예프를 닮았다고 할까.
테러가 다 그렇지만 보스턴 테러도 특이하다.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 그것도 체첸 출신이 저지른 것이란 점이 그렇다. 러시아를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연결이 잘 안된다. 그런데 엊그제 조하르가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테러의 주요 동기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접하니 의문의 일단이 풀린다.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이 ‘외로운 늑대’들의 테러 동기가 도덕적 분노와 관련 있었다는 말이 된다. 미국은 위선적 국가다.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선전한 대량살상무기(WMD)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점에 대해, 또 무고한 인명들이 수없이 희생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부시 전 대통령은 며칠 전 자신의 기념관 헌정식에 맞춰 이런 얘기를 언죽번죽 해댔다. “난 할 일을 했고 역사가 최종적으로 심판할 것이다.” 많이 들어본 ‘후세 사가’ 타령이다. 무고한 시민들을 겨냥한 테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테러의 토양이 온존한 것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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