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개념이 없다”고 하면 상식을 벗어난 행동, 태도가 거슬린다는 뜻이다. 이런 특수한 용례도 있지만 어떤 사물과 현상의 개념을 올바르게 안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개와 고양이의 개념이나, 춥다와 덥다의 개념 같은 게 사람마다 헷갈린다면 세상은 정상적 소통을 포기해야 할 거다.
원시인들의 말에는 ‘추상(抽象)’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예를 들어 ‘걷다’란 일반적 개념의 동사 대신 ‘어슬렁어슬렁 걷다’ ‘허겁지겁 걷다’와 같이 구체적인 행동에 따라 다른 동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밤하늘의 달도 최초에는 ‘초승달’ ‘반달’ ‘보름달’처럼 별개의 명사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그러다 인간 사유와 추상능력이 발달하면서 추상성을 가진 언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추상성은 양날의 칼 같은 존재다. 인간은 그 덕분에 사유의 깊이와 다양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 가혹한 대가가 있었으니 바로 언어 개념 자체의 혼란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종종 추상성의 미로에 갇혀 버린다. 결과는 참담하다. 같은 언어를 쓰되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촘스키 교수는 언어학자답게 이 문제를 명쾌하게 분석한 적이 있다. “심지어 중앙정보국(CIA)도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의 접근방식과 분석법은 좌파들과 무척 흡사하다. 다만 동일한 현상에서 끌어내는 결론이 서로 다르다. 그 차이는 결국 가치관의 차이를 반영한다.” 나는 이 글을 이렇게 고쳐 읽는다. “그들도 ‘똑같은 언어’로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언어 개념의 혼란이 ‘같은 언어로 다른 말하기’를 초래한다.”
개념은 사물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다. 경제민주화의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것은 뜬구름 잡은 것과 같다. 언어의 혼란만 가져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엊그제 “경제민주화는 대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 소비자 등 모든 경제주체들이 열심히 일하면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를 벌주거나 하는 것은 본래 경제민주화의 취지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고 한다.
요즘 말 많은 경제민주화에 대해 나름의 개념 규정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 개념화에서는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대기업의 시장지배 완화, 빈부격차·양극화 해소, 재벌개혁 등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빠져버린 경제민주화는 진짜 경제민주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개념이 없는 것이다.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 구로공단의 추억 (0) | 2013.04.30 |
---|---|
[여적] 조하르 두다예프의 기억 (0) | 2013.04.24 |
[여적] ‘티나’로 기억될 여인 (0) | 2013.04.09 |
[여적] 어려운 ‘창조경제론’ (0) | 2013.04.01 |
[여적] 받아쓰기 (0) | 2013.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