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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밀실과 광장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천의봉씨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공장 앞 송전탑에 오른 지 4일로 200일째를 맞았다. 지상 25m 높이에서 참 긴 시간을 버텼다. 가을에 올라간 게 칼바람 부는 겨울을 거쳐 봄이 되었으니까. 이런 농성 장기화는 누구도 예상 못했다. 최씨도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면 올라오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다. 최씨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을 ‘2평 남짓한 하늘 위’라고 표현했다. 그 사이 청와대 주인이 박근혜 대통령으로 바뀌었다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내려올지 모르는 막막함을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난해 10월 송전탑에 올라간 최병승씨(오른쪽)와 천의봉씨가 고공농성 200일을 이틀 앞둔 2일 오후 철탑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제공



생뚱맞을지 모르나 그의 말은 연상작용을 일으켜 나를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세계로 인도한다. 소설은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설 ‘광장’을 찾지 못한 주인공이 제3국행 배를 탔다가 행방불명된다는 줄거리다. 광장은 사회적 삶의 공간이지만 남과 북에서 이데올로기란 암초에 부딪친다.

작가의 소설 서문이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사회적 삶과 밀실로 상징되는 실존적 삶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철탑 농성을 두고 말할 때 이 시대 이곳에서의 광장의 의미를 조금은 특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 광장은 소통이 이뤄지는 열린 공간이다.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정규직 전환에 대한 열망과 성취일 수 있다. 이 열망을 이루기 위해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철탑에 올랐다. 광장으로 나가기 위해 밀실행을 자청한 셈이다. 자청이라지만 이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상에서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으니까.

그러나 이 절박한 선택 역시 지상의 광장을 맴돌다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다. 지난 200일 동안에도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란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고, 중앙노동위는 사내하청업체 노동자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현대차는 꿈쩍도 안 하는 모습이다. 불법파견을 부정하고 사내하청 노동자 일부를 신규채용하겠다고만 한다. 200일이 지나 300일이 되면 이들이 밀실에서 풀려나 광장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이대로는 기약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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