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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잡초에 대한 덕담 한마디

6월 8일 오후 5:59 페북에 올렸던 거 다시 올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UVxdnaj7Is 나훈아 잡초

지금은 민들레, 애기똥풀이 들어가고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날 때다. 퇴직 후 하루 만보 걷기를 10년째 하고 있는 내가 요즘 즐겨 듣는 노래가 있는데, 나훈아가 부른 <잡초>다.

아무도 찾지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민들레 애기똥풀 개망초는 그나마 이름이라도 안다. 산책길에 보는 대부분의 들꽃들은 이름을 모른다. 노래 가사에도 ‘이름 모를 잡초야’라고 했듯.

2018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방영된 SBS드라마 ‘복수가 돌아왔다’에 나오는 고교 특별반 이름이 ‘들꽃반’이다. 각 반의 문제아들을 모아 만든 신설반이다. 생각하건데 차마 ‘잡초반’이라 부르기에 부담스러워 ‘들꽃반’을 쓴 거라고 지레 짐작해 본다. 하긴 1980년대 내가 서울시교위에 출입할 때 이미 고교엔 장미반 백합반 수선화반이란 이름이 있었다.

잡초라고 뭉뚱그려 불리는 식물들에도 사실 다들 이름이 있다.

향토색 짙은 민족문학을 추구한 작가 김정한 선생(1908~1996)은 생전에 우리말 구사에 대한 엄격한 신조로 유명했다. 한 번은 제자 최영철 시인을 이런 말로 꾸짖었다고 한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노. 시인이라면 낱낱이 찾아서 붙여줘야지.” 선생이 보기에 ‘이름 모를 새’나 심지어 ‘이름 없는 꽃’이라고 쓰는 것은 게으름 탓이었다. 다 자기 이름이 있건만 명색 문인이 꽃이름 풀이름도 잘 모르고 얼버무려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시인·소설가의 게으름이 첫번째 이유라면 두번째로 지적할 건 언어의 추상화다. 물론 인간이 자연과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어의 추상화 덕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의 추상성이 언어개념 자체의 혼란을 동반했다. 우리를 추상성의 미로 속에 가두는 것은 서로 확연히 다른 말을 하는 경우보다 ‘같은 언어로 다른 말하기’일 때가 많다.
 
공자도 일찍이 말과 실질의 혼란에 대해 설파했다. 자신이 살았던 춘추시대 말기의 사회 정치적 혼돈이 명(名)과 실(實)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정명론(正名論)을 제시했다. 공자의 정명론은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을 설파한 것이지만, 말과 이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관한 한 일화가 이 정명론을 닮았다. “주위의 많은 학생들은 그가 헤겔의 ‘진리라는 것은 늘 구체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즉 진리라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 아래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었다.”(‘새로운 러시아 사람들 The New Russians’ 71쪽, 교양사, 1996)

새삼 <잡초> 노래 가사를 인용한 건 시비를 걸자는 심사가 아니다. 설렁설렁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풍토를 비판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강한 진보가 형용모순으로 취급되는 현실과 국가 지도자의 뒤죽박죽 본말전도 가치관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싶었다. 틈만 나면 두서없는, 이치에 닿지 않는, 비논리적인 말을 늘어놓는 지도자의 말버릇에 대해. 동시에 그런 화상의 특징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까맣게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도.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사회의 공통적 언어체계인 랑그와 개인의 언어행위인 파롤로 분류했다. 파롤은 랑그라는 사회적 약속 아래서만 의미를 갖는데 파롤이 랑그에 우선하는 것 같은 언어의미의 혼란은 결국 사회적 가치 혼란의 동어반복일 수도 있겠다.

잡초에 대한 변호 한마디 하고 가겠다. “태풍에 뿌리가 뽑히는 것은 큰 나무이지 잡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