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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객닷컴] 우리는 아직 더럽게 후진국이다

 오지 여행가, 긴급구호 활동가 한비야는 책 <중국견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국에서 낯선 사람끼리 만나면 맨 처음 물어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름일까? 천만에. 어느 나라 사람이냐다. 국제회의에서 모르는 참가자들끼리 만날 때에도 명찰에 써 있는 국적이 이름보다 훨씬 궁금하다.”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나를 확인시키는 첫 번째 창은 한비야가 아니라 ‘한국인’이었다고 말한다. 국가와 민족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서 이런 얘기는 다소 뜻밖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을까. 우선 분단국가다. 한국은 사실상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잊고 살다가도 며칠 전 북한이 개성 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것을 보며 실감하게 된다.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었지!

 

 한국은 또 어떤 나라일까. 우울한 이야기를 더 해야 겠다. 발달장애인과 가족이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채 죽어가는 나라다. 지난 3일 광주에서 20대 중증 발달장애인 아들과 50대 어머니가 차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의 죽음에도 코로나19는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로 주간보호센터가 문을 닫으면서 어머니 ㄱ씨는 아들을 돌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ㄱ씨는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아들의 몸무게가 석 달간 10㎏ 이상 빠지자 지난달 다시 집에 데려왔다. 이후에도 아들이 지낼 곳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고 다시 아들을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한 날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6월 10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최근 사망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추모하고 내실 있는 지원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지난 3월 제주에서도 같은 이유로 돌봄 사각지대에 놓인 발달장애인 아들과 어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모든 것을 코로나의 습격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코로나19 이전에도 매년 비슷한 죽음은 있었다. 2013년 10월과 11월 부산과 서울에서, 2014년 3월 경기도 동두천에서, 2015년 1월과 3월 대구와 서울에서, 2016년 3월 울산에서, 2018년 11월 서울에서…. 부모 또는 형제자매가 발달장애 가족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이 이어져왔다.

 

사진 청와대 청원 홈페이지 캡쳐

 

 전국장애인부모연대의 부모들은 지난 10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 모였다. 세상을 떠난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추모하고, 정부에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반복적으로 발생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죽음은 코로나19에 따른 천재가 아닌 장애인과 가족을 방치한 정부의 인재”라고 주장했다. “발달장애인의 특성과 필요를 고려한 돌봄 지원체계가 있었다면, 필요할 때 자녀를 돌보거나 보호해줄 수 있는 기관이 있었다면 죽음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국에 등록된 발달장애인은 24만1614명이다. 오래 전부터 발달장애인 부모들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요구해왔고, 정부는 2018년 9월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앞서 2014년엔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그러나 대책이 생기고 법이 만들어졌다고 이들의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약속했던 사업은 예산 부족으로 제자리를 맴돌았다. 광주장애인부모연대 김유선 지부장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더 촘촘하게 제도화하는 것만이 많은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라고 주장했다.

 

 ‘더 촘촘하게 제도화하는 것’은 나라에서 다 책임져 달라는 뜻일까. 지난 6일 시작된 ‘광주의 발달장애인 부모일동’의 청와대 청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국가에게 내 자녀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현실은 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집으로, 내 새끼의 세상이 온통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만 가득 찬 세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녀들이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를 마련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증의 발달장애인을 위해 다시 주간활동 1대 1 지원을 부활시켜 줄 것 등 여섯 가지를 희망했다.

 

 지난 16일 소설가 김훈은 신작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인류사의 모든 혁명은 인간이 약육강식을 견디지 못해 벌어졌다. …약자가 살기 위해 자신의 고기를 강자의 먹이로 내줘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아닌가.” 그의 말에서 ‘약자’는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내게는 들린다. 그들은 혁명은 꿈도 꾸지 못할 철저한 약자들이다.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다. “K-팝, K-방역 등 좋은 것들엔 K를 갖다 붙이는 게 유행인 듯싶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제는 ‘선진국’이란다.” 이 블로거는 동생이 발달장애인이었는데,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고 밝힌 뒤 이 말로 글을 맺었다. “우리는 아직 더럽게 후진국이다.”  

2020.06.18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