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갑질사회’에서 터진 기수의 죽음

경마라고 하면 필자는 미국의 전설적 기수 스티브 코슨 정도만 떠올리는 문외한이다. 그를 알게 된 것도 1980년 대학 ‘타임반’에서 기사를 읽은 덕분이다. 그는 18세 때인 1978년 최연소로 켄터키 더비를 비롯해 ‘트리플 크라운(3관 경주)’을 석권한 인물이다. 1977년 한해에 600만달러(약 70억원) 이상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1992년 은퇴해 고향 켄터키에서 종마사육장을 운영하며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장면을 바꿔보자. 지난달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갑질과 부조리가 만든 타살, 마사회는 경마기수 문중원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한국마사회 부산경남경마공원 소속 기수인 문중원(40)씨는 지난해 11월 29일 경마공원 숙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가족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들은 문씨의 죽음이 억울하다며 장례를 거부한 채 지금까지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마사회의 부조리한 운영을 비판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문중원 기수의 유족과 시민대책위가 13일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엇이 억울하다는 것인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광화문 플래카드에도 등장한 ‘갑질’이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심정을 A4용지 3장의 유서에 담았다. “요즘에는 등급을 낮춰서 하위군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대충 타라’고 작전 지시를 한다. 부당한 지시가 싫어서 마음대로 타면 다음엔 말도 안 태워 준다.” “일부 조교사들은 말 주행 습성에 맞지 않는 부당한 작전 지시를 내린다.” 부정경마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한달반째 장례도 거부한 채 농성

현역 기수는 서울 부산경남 제주경마장을 통틀어 125명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한 직업이다. 우리는 간호사 사회의 ‘태움’ 등 악명 높은 직장 내 갑질을 알고 있다. 그런데 기수와 경마 세계에도 심각한 갑질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갑질은 조교사의 부당한 작전 지시 등 다양하다. 그는 15년 동안 기수로 일하면서 2015년 조교사 면허도 땄다. 조교사는 마주와 계약해 말의 관리와 훈련을 책임지는 개인사업자로, 밑에 기수와 마필 관리사를 두고 있다.

그것도 돌파구가 될 수 없었다. 문씨는 “죽기살기로 조교사 면허를 땄지만, 마방(마구간)을 받지못하면 다 헛일이다. 면허 딴 지 7년이 된 사람도 안주는 마구간을 갓 면허 딴 사람에게 주는 경우도 있다”고 썼다. 조교사는 마사회의 심사를 거쳐 마방을 임대받아야 영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마방 임대의 공정성도 문제라는 주장이다.

그는 경마를 사랑하는 기수였다. 23기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100승을 올렸다. 2008년엔 6개월 동안 호주 연수도 다녀왔다. 2012년 한 인터뷰에서 ‘기수라는 직업 선택에 후회는 없나’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같이 동고동락했던 마필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 이런 시름은 일순간에 눈 녹듯 사라진다.”

서울경마공원에서 펼쳐지고 있는 야간 경마경기. 열기가 뜨겁다.

그랬던 그가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답답하고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 유족과 공공운수노조는 마사회 내부 상황에 대한 진상 규명, 갑질 당사자에 대한 처벌과 불평등한 계약관계 등 개선, 마사회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문씨는 2005년 개장한 부산경남경마공원 원년 멤버였다. 이곳에선 그동안 그를 포함해 기수·마필 관리사 7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번에도 진상 규명이 안 된다면 불행한 일은 재발할 개연성이 높다.

경마계 부조리는 한국사회 축소판

문씨가 숨진 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전국 기수 125명 가운데 7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58.5%가 ‘조교사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고작 125명이 뛰는 직종에서 벌어지는 갑질이라고 외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갑질이 만연한 한국 사회의 축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경마는 무시못할 존재다. 공기업인 한국마사회의 2018년 매출은 7조5753억원, 당기순이익은 1827억원이었다. 마사회는 2012년 법인세 납세실적이 삼성전자와 현대차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1조4650억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 기수가 죽음으로써 경마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경찰은 철저하게 수사하고 관련 부처는 치밀한 대책을 세울 일이다. 이 바닥에 어떤 갑질이 온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뿌리뽑아야 한다. 2020-01-15 13: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