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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위로다

낭만과 방랑과 술과 노래와


 낭만과 그 짝 방랑


 어떤 노래에 대해 흔히 낭만적인 곡이란 표현을 쓴다. 요즘 노래에선 옛날의 낭만이 사라졌다고도 한다. 최백호는 아예 <낭만에 대하여>란 곡을 만들어 불렀다. 낭만이란 무엇인가. 이 노래로 얘기를 시작하자.


                                      최백호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1995·최백호 작사 작곡) 가사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노래다. 제목부터 독특하다. 떠나보낸 청춘, 중년이 겪는 삶의 허무, 잃어버린 낭만을 그리워하는 노래에 ‘낭만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였다. 왠지 뜨거운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는 태도 같다. ‘무엇 무엇에 대하여’는 본디 논문 같은데 제목 붙이는 방식 아니던가. 게다가 ‘낭만에 대하여’란 가사는 맨 끝에, 부제(副題)처럼 붙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서를 이국적인 탱고 리듬에 실었다. 발표 당시 최백호는 “탱고는 낭만을 담은 리듬”이라며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유행한 탱고로 중년팬들의 젊은 시절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주1】

 

 최백호가 그려낸 낭만을 살펴보자. 노래엔 궂은 비,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옛날엔 그런 국산 위스키 상표가 있었고, 다방에서도 잔술로 팔았다. 그래서 기분이 어쩌다 싶으면, ‘마담, 여기 위스키 따블!’을 외치곤 했다), 색소폰, 새빨간 립스틱, 선창가, 뱃고동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이런 것들이 낭만이란 추상어의 이미지와 잘 연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거다. 동의할 수 있다. 낭만은 옛 것, 첫사랑, 거리와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비 그런 것들과 이미지가 통한다.


 꼭 낭만을 노래한 가수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낭만은 ‘다시 못 올 것’ 같은 과거완료형으로 다가온다. 낭만에는 상실감을 동반한 아련한 추억 같은 무엇이 묻어 있다. 낭만은 어느 편이냐 하면, 대체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려서, 또는 잃고 있어 안타까운 것이다.【주2】


 이런 인식과 정서엔 근거도 있다. 낭만주의, 즉 로맨티시즘의 어원인 ‘로맨틱(romantic)’이란 말은 중세의 픽션인 로망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비현실적, 놀라운, 지나치게 환상적인, 감상적인’ 것을 가리킨다. 로맨티시즘은 계몽주의의 이성에 대립해 감성적 요소, 즉 감정, 느낌, 격정, 상상력, 영감 등을 강조하고, 또 자연적인 것을 추구했다.【주3】우리가 ‘젊은 시절의 낭만’, ‘열정과 낭만이 넘치던 학창 시절’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 이유다. 사전은 낭만(浪漫)을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낭만에 대하여>는 여기에 덧붙여 절제의 미학까지 갖추고 있다. 잃어버린 낭만을 그리워하되 드러내놓고 탄식하지는 않는다.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이라 하고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이라고 한다. 이유는 체념적이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그럴 수 없다는 거다. 실연조차 달콤했던 그 시절을 담담히 회고한다.


 그걸 아시는가. 낭만적인 노래는 많지만, 낭만에 관한 노래는 적다는 사실을. 노랫말에 ‘낭만’이 들어간 곡은 의외로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낭만에 대하여>나, 체리필터가 부른 <낭만고양이>(2002) 정도가 고작이다. “내 두 눈 밤이면 별이 되지/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한경록이 작사하고 정우진이 작곡한 <낭만고양이>는 외로운 도시의 고양이를 의인화하면서 감정이입을 한 노래로 보인다. 이렇게 가사 속에 낭만이란 말이 희소한 까닭은 그 개념이 굉장히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이란 말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반면 낭만과 거의 항상 짝을 이루는 방랑(放浪)이란 말은 제법 많은 곡에서 나온다.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구체적 행위가 낭만의 정서를 표출하는데 그만인 것이다. 최백호는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앨범 ‘슬픔의 피에스타’에 수록된 곡 <방랑자>(2011)에 난생 처음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음유시인처럼 힘을 빼고 나지막이 읊조리듯 부르는 창법으로 젊은 음악 팬들에게도 크게 어필했다.


 방랑의 노래는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다. 실향과 방랑은 유독 이 시대에만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독특한 제재로서, 일제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드러내 주었다. <황성의 적>이나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그러한 절절함을 지니고 있다.【주4】물론 이 시대 노래의 방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 방랑과는 사뭇 결이 다른, 한맺힌 것이었다.

 

 

방랑가를 부른 강석연. 왼쪽은 가수 노벽화다 


 우리 가요의 초창기이기도 했던 그때 이미 <방랑가>란 노래가 나와 널리 불렸다. 1931년 이규송이 작사하고(작곡자는 미상) 강석연이 부른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뉘가 알거나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울 새/ 방랑의 하루해도 저물어가네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가약 굳은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 늙어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방랑가> 가사


 이 노래를 들어보면 레로 시작해 솔로 끝나는 3박자곡이란 점이 특이하다. 우리 민요 경토리 선율의 구성음이 솔·라·도·레·미이고 ‘솔’로 마치는 형이 많다는데, 혹시 이와 관련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 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반응이 워낙 드높아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 이애리수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취입하여 발매하기도 했다.【주5】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처럼 낭만주의는 사랑을 향한 열정, 방랑과 방황을 아름답게 그린다. 방랑 주제의 음악에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을 빼놓고 갈 수 없다. 내가 과거 쓴 칼럼의 한 대목이다.


 까닭없이 삶이 쓸쓸해질 때, 슈베르트가 위안이 돼 준다. 피아노곡인 그의 환상곡 C장조 <방랑자>를 듣는다. 쇼팽의 음악이 ‘화사한 우수’라면 슈베르트는 그냥 외롭고 슬프다. 짧은 삶을 보헤미안처럼, 겨울나그네처럼 살다 가서일까. 그는 가곡 <방랑하는 나그네>도 작곡했는데, “그대가 없는 곳, 그곳에 행복이 있다”고 사랑에 찢어지는 마음을 노래한다.

 

 

           

                                              알프레드 브렌델

 

 ‘방랑자’는 알프레드 브렌델(1931~)의 연주로 들어볼 일이다. 도수 높은 뿔테안경을 쓴 그는 도무지 낭만적 감정에 휩쓸릴 것 같지 않은 진지한 외모의 피아니스트다. 그런 그가 의외의 말을 했다고 한다. “방랑은 낭만의 조건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조건을 따르고… 어떤 이는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 내몰려 고통받는다.” 이런 기막힌 말을 던진 그가 독일 TV에서 녹음한 ‘방랑자’ 연주를 유튜브에서 봤다. 3악장 피날레에서 보여준, 온몸을 내던지는 격렬한 몸짓은 파격이었다. 그때 그의 가슴속에선 낭만과 방랑의 기쁨, 고통이 교차하지 않았을까.【주6】

 


                                                             박인희


 1976년 박인희는 <방랑자>를 불러 크게 히트했다. 이 곡은 이탈리아 가수 잔니 모란디의 <바가본도>(1975)를 번안한 것이다.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에 우리 다시 만나리라…(하략)
                                                               <방랑자> 가사


 1979년 MBC대학가요제 대상곡인 <내가>(김학래 작사 작곡, 김학래·임철우 노래)의 화자도 방랑자·떠돌이 신세를 노래한다. 사랑의 실패로 인한 방랑에도 종류는 여러가지다. 앞에 나온 슈베르트의 <방랑하는 나그네>는 “그대가 없는 곳, 그곳에 행복이 있다”는 이유로 방랑을 택한다. <내가>에서는 ‘이내 마음 다하도록 사랑한다면 슬픔과 이별 뿐이네’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한 역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이치에 닿지 않는 역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사랑 노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화자는 사랑을 잃더라도 상념의 방랑자가 되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는 의지를 아름다운 화음에 담아 드러낸다. 현실에서 방랑자가 되긴 힘들다. 대개 정신적으로나 가능하다. 그 점에서 ‘상념의 방랑자’는 꽤 솔직한 표현이다. 어쨌든 요즘 이런 사랑 참 드물다.


 이 세상에 기쁜 꿈 있으니 가득한 사랑의 눈을 내리고
 우리 사랑의 노래 있다면 아름다운 생 찾으리라
 이 세상에 슬픈 꿈 있으니 외로운 마음에 비를 적시고
 우리 그리움의 날개 있다면 상념의 방랑자 되리다

 이내 마음 다하도록 사랑한다면 슬픔과 이별 뿐이네
 이내 온정 다하도록 사랑한다면 진실과 믿음 뿐이네
 내가 말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의 돌이 되겠소
 내가 님 찾는 떠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겠소…(하략)
                                            <내가> 가사


 한 잔 술에 설움을


 울적할 땐 한 잔 술에 노래 한 곡이 더없이 위로가 된다. 나훈아가 부른 <머나먼 고향>(1971·박정웅 작사 작곡). 필자는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낼 때 가끔 보드카 한 잔 마시고 한국인 노래방에 가서 이 노래를 부르며 향수를 달래곤 했다. (참고로 보드카의 정확한 표기는 보트카가 맞으나 사전엔 보드카로 돼 있다) 유튜브엔 이런 댓글이 눈에 띈다. “나의 18번, 이 노래 잘 불러 군대서 특별휴가까지 갔었는데. 술을 끊은 후에 ‘한잔 술’이 ‘한잔 커피’로 바뀌었지요!” 그래, 노래는 추억이고 낭만이다.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천리타향 낯선 거리 헤매는 발길/ 한 잔 술에 설움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 하늘을 달려갑니다
                         <머나먼 고향> 가사

 

      이장희는 1974년 <한잔의 추억>을 만들어 불렀다.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은
 어데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취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은
 반쯤 찬 술잔 위에 어리는 얼굴
 마시자 한 잔의 추억/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시자 마셔버리자

 기나긴 겨울밤을 함께 지내며/ 소리없는 흐느낌을 서로 달래며
 마주치는 술잔 위에 흐르던 사연/ 흔들리는 불빛 위에 어리던 모습
 그리운 그 얼굴을 술잔에 담네

 어두운 밤거리에 나 홀로 서서/ 희미한 가로등을 바라보면은
 어데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행여하는 마음에 뒤돌아보면
 보이는 건 외로운 내 그림자…(하략)
                                       <한잔의 추억> 가사


 젊은 시절 서울 신촌 인파로  붐비는 밤거리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쳐주었으면…’ 하고 걸었던 기억이 있다. 혼자 술을 마셨던가. 그래서 이 노래 3절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어이없는 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한 잔의 술과 추억을 마시자는 이 노래가 향락 조장을 한다고 금지곡 판정이 났다는 사실이다.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1975년 7월 대중가요 45곡에 대해 곡과 가사가 퇴폐 저속하다는 등의 이유로 금지곡으로 결정했는데 <한잔의 추억>에는 향락 조장이란 이유가 달렸다. 함께 금지곡이 된 이장희의 <그건 너>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웃기는 구실을 댔다.


 고독은 방랑의 친구다. 그대 없는 거리는 황량할 뿐이다.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1991·김창기 작사 작곡)다.

 

 거리에 가로등 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 곳으로 떠나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 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가요…(하략)
                                                   <거리에서> 가사


 바이브의 <술이야>(2006·류재현 작사 작곡)도 1970년대에 나왔으면 즉각 향락 조장한다며 금지됐을 법한 노래다. 사랑을 잃고 맨날 술에 젖어 사는 모습을 그리는데 가사의 각운(脚韻)이 효과를 발휘한다. 각운은 시에서 구나 행의 끝에 규칙적으로 같은 운의 글자를 다는 것을 말한다. 이 노래 후렴에선 술이야, 줄이야, 남이야, 술이야가 반복되면서 지겹지만 또 마실 수 밖에 없는 공허함을 잘 전달한다. 듀엣인 바이브의 윤민수는 언젠가 방송에 나와 싱어송라이터인 류재현이 “술을 마실 때는 곡이 잘 나왔었는데 (결혼을 하고) 착실히 살더니 곡이 잘 안나온다”라고 폭로하기도 했다고.


 슬픔이 차올라서/ 한 잔을 채우다가 떠난 그대가 미워서
 나 한참을 흉보다가/ 나 어느새 그대 말투 내가 하죠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널 잃고 이렇게 내가 힘들 줄이야
 이제 난 남이야 정말 남이야/ 널 잃고 이렇게 우린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슬픔이 차올라서/ 한 잔을 채우다가 떠난 그대가 미워서
 나 한참을 흉보다가/ 또 다시 어느새 그대 말투 또 내가 하죠
  …(중략)
 술 마시면 취하고(술마시면 취하고)/ (나)나 한 얘기를 또 하고(또 하고)
 이제 넌 남인 줄도 모르고 너 하나 기다렸어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널 잃고 이렇게 내가 힘들 줄이야
 이제 난 남이야 정말 남이야/ 널 잃고 이렇게 우리 영영 이제 우리 둘은
 정말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저물어가는 오늘도 난 술이야
                                          <술이야> 가사

 

 

                                                           이난영

                                                         

 술과 따라가기 십상인 담배도 가요에 더러 등장한다. 그런 노래의 고전은 이난영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1939·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이다. 이 노래는 작곡자 김해송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재즈 스타일의 곡으로 평가된다. 블루스 음계의 특징인 ‘미♭’를 구사하며 A(가장조)에서 Am(가단조)로 능란하게 같은 으뜸음 조바꿈을 한다. ‘블루스에 나는 운다’란 신식 노랫말도 나온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흘러간 꿈은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다방의 푸른 꿈> 1절 가사


 이 노래에 대해 작곡가 황문평이 했던 평을 소개할 만 하다. 

 

  일제 말엽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 무대에서 이난영은 검은 터번 머리에 담배를 피워 물고 약간 코에 걸린 목소리로 아주 애수에 잠긴 노래를 불렀다. 곡목은 <다방의 푸른 꿈>, 아마 올드팬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이 노래는 이난영의 진짜 히트넘버였다.【주7】이 노래를 부를 때에 가수 이난영은 한복을 입지 않고, 긴 드레스에 긴 검은 장갑을 끼었다고 한다. 큰딸인 김시스터즈의 김숙자는 어린 나이에도 우리 엄마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64년 최희준이 부른 <진고개신사>(심영식 작사, 김호길 작곡)도 ‘내뿜는 담배연기’로 노래를 시작한다.


 미련없이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별마다 새겨보는 별마다 새겨보는/ 아아 아아 진고개 신사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언젠가 불러주던 그 여인의 노래를
 소리없이 불러보는 소리없이 불러보는/ 아아 아아 진고개 신사

                                          <진고개신사> 가사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1994·강승원 작사 작곡)에서 담배 연기는 결코 빠져선 안될 소품이다. 그건 나이 서른, 멀어져가는 청춘의 상징이므로. 내뿜는 담배연기 말고 무엇으로 그 헛헛한 심경을 그려낼 수 있으랴.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음을 문득 깨달은 화자로서.

 

 

                          

                                                           김광석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하략)

                                                <서른 즈음에> 가사    


【주1】동아일보 1996년 9월 12일자 ‘삼바 삼바 삼바 라틴댄스 바람’ 기사
【주2】경향신문 2012년 2월 3일자 여적 ‘SNS와 낭만’(김철웅 논설실장) 부분 인용
【주3】김영한 외, 서양의 지적 운동 1·2(지식산업사, 1994) 467~504쪽 로맨티시즘(이종훈)
【주4】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민속원, 2006) 일제시대 방랑 노래의 진정성 93쪽
【주5】매일신문 웹페이지 2012년 10월 18일자,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강석연(하)
【주6】경향신문 2013년 5월 8일자 김철웅 칼럼 ‘음악이 주는 위로’, “방랑은 낭만의 조건”이란 말에 대해선 그렇게는 알려져 있으나 브렌델이 언제 어디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확인 못했다.
【주7】황문평, “이난영은 블루스의 한국적 진수”, 경향신문 1980년 10월 22일자.
최유준 저 대중음악과 공감의 그늘(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이난영의 눈물 96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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