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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몸통·깃털 사건’의 공식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진다. 언론은 시시콜콜 의혹을 제기한다. 수사팀이 꾸려져 장기간 수사가 펼쳐진다. 
뭐가 나올까.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 딱 그 짝이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발표 얘기다.

처음부터 사건은 핵심적 권력이 개입한 혐의가 짙었다. 청와대니 영포라인, 비선조직이니 나오는 말부터 거명되는 모모한 자들의 면면까지 그랬다. ‘게이트(권력형 비리)’성 사건이 분명했다. 사람들 마음 한 구석의 불안감이 커져갔다. 
사건의 배후는 감춰지고 지원관실 실무진 몇명만 손보는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될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시킨 자는 오리무중인데 달랑 심부름꾼 두명만 구속됐다.

사건 초기부터 사람들은 어떤 기시감(旣視感)에 시달렸다. 이런 유의 권력형 비리는 필경 ‘몸통’은 건재하고 ‘깃털’만 처벌될 것이라는. 그 기시감은 반복된 경험의 소산이다. 이런 사건은 ‘몸통·깃털 사건’으로 명명해도 될 만큼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또 정형화한 경로를 밟아 처리되는 것을 봐왔다. 

몸통·깃털 논란의 원조는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이라고 할 만하다. 1997년 한보그룹 특혜대출 사건에 휘말린 그가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돼 ‘검찰이 몸통은 놔둔 채 깃털만 건드렸다’는 논란이 확산됐다.
 이때부터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지면 몸통·깃털론이 유행했으니 그가 별로 명예롭지 않은 저작권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 후 숱한 사건에서 몸통·깃털론이 제기됐다. 99년 김대중 정부 때 옷로비 사건에서도 깃털만 수사했다는 말이 나왔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연루된 비리 사건에서도 한나라당은 “신정아 의혹의 윗선 실세를 보호하기 위한 꼬리자르기식 수사를 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당시 박형준 한나라당 대변인은 “검찰 수사가 몸통 은폐용으로 진행된다면 국민의 검찰이 아닌 청와대의 검찰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추궁했다. 지난 봉은사 외압사태 때 명진 스님은 “안상수 대표는 깃털이고 몸통은 따로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몸통·깃털 사건’들에는 중대한 공통점이 있으니, 몸통은 좀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통으로 규정하는 순간 몸통 규명 가능성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퇴행하는 닫힌 사회에서 또 어떤 권력 사유화 사건, 깃털만 뽑는 사건이 벌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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