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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오이 시식회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와중에 반드시 열리는 행사가 있다. 시식회다. 올해 초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한우·한돈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시식회가 열렸다. 두말 할 것 없이 구제역 파동으로 급감한 소비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3년 전 조류인플루엔자가 확산됐을 땐 총리가 전남 영암을 방문해 삼계탕을 먹었다. 75도 이상 온도에서 5분간 끓이면 해가 없다고 홍보했다. 이와는 조금 경우가 다른 것이 재작년 여름 수입쇠고기 파동 때 국회에서 열린 미국산 등심 시식회다.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우보다 맛있다”며 미국산 쇠고기를 예찬해 한우농가들을 분노케 했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것이 시식·시음회다. 그런데 때로는 안 하는 것만 못할 정도로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도쿄 시민들까지 수돗물의 안전성을 의심하자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정수장을 찾아 수돗물 시음 행사를 벌였다.
문제는 방송에 잡힌 이시하라의 표정이었다. 싫은 걸 억지로 먹는 것처럼 불편해 보였다. 혹자는 “사약 마시듯 수돗물을 마신다”고 했다. 일회성 행사라도 진정성이 중요한 것이다.
 
지난 21일 후쿠시마에서 한·중·일 3국 정상이 벌인 오이 시식회는 참으로 이색적인 시식회로 기록될 것 같다. 이들은 원전 사고 피해지역에서 난 오이, 방울토마토 등을 시식했다. 문제는 일본이 이 행사를 한·중 정부와의 사전 의전 협의 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교관례를 무시한 결례다. 한·중 정상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제의를 받고 웃으며 오이 등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짐작하건대 방사능이 묻었을지 모를 채소를 시식하는 심정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식하는 사진 속 세 사람의 웃음이 가식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웃음 뒤에 숨어 있다. 세 사람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원전안전 협력, 재난관리 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원전 비상 시 조기통보체제를 구축키로 했다.
쉽게 말해 동북아 원전 애호 3국이 뭉쳐 안전에 관한 협력을 다짐한 거다. 중국은 현재 원전 13기를 가동 중인 미래의 원전대국이다. 원전 21기가 있는 한국은 대통령이 일본의 사고에도 흔들림없이 원전 강화 정책을 다짐하고 있다. 사고 당사국 일본은 그나마 기존 원전 정책의 폐기를 공식화한 상태지만 조야에 포진한 ‘원전 기득권층’의 저항이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이번 오이 시식회 해프닝은 이런 3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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