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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광기 대 이성, 광기 대 광기

2006년 12월30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처형됐을 때 경향신문은 ‘문명세계를 부끄럽게 한 후세인 전격 처형’이란 사설에서 “후세인의 처형은 미국과 부시 행정부의 위선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반문명적, 반민주적 폭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런가. 
 
재판의 졸속, 불공정성 때문이다. 후세인은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된 지 닷새 만에 형이 집행됐다. 집행일은 이슬람 최대 축제인 ‘알 아드하(희생제)’ 첫날로 이런 날 처형한 것은 이슬람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체포된 후 3년이 지나 전격 처형된 데는 미국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미국이 학수고대하던 대량살상무기도 안 나왔고 전황은 악화일로였다.

부시는 중간선거에서 참패해 이라크 전략 수정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후세인 처형은 좋은 돌파구였다. 처참한 교수형 장면이 공개돼 아랍권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뉴욕타임스는 “복수심에 눈이 먼 시아파의 성급한 행동이 후세인을 범죄자에서 순교자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빈 라덴의 죽음에도 비슷한 구석들이 있다. 미국은 처음엔 그가 AK47 소총을 쏘며 격렬히 저항해 사살했다더니 다음날엔 무기가 없었다고 말을 바꿨다. 비무장 상태의 용의자 머리에 총을 쏘고 확인 사살까지 한 셈이다. 12세 딸은 미군이 생포한 그를 가족들 앞에서 사살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재판 없는 즉결처형이었다. 

후세인 학습효과인지 이슬람 전통에도 없는 수장으로 시신을 급히 처리하더니 이번엔 끔찍한 최후 사진을 공개할지 여부로 갑론을박했다. 두 사람의 최후 과정보다 더 의미있는 유사성은 이들의 죽음 이후다. 후세인을 없앰으로써 이라크에서 국면전환을 꾀하려던 미국의 의도는 먹혀들지 않았다. 종파 간 유혈사태는 더 격화했고 수니파의 저항은 후세인의 생사와 무관하게 거셌다. 빈 라덴 사후 보복 테러 위기는 고조됐다. 

성서는 악을 이기는 수단은 악이 아니라 선이라고 가르친다. 로마서에는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갚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재앙으로 갚는다”는 말도 비슷한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왕왕 악을 악으로 징치하는 게 현명해 보인다. 유럽 쪽에선 9·11 테러의 수괴 빈 라덴을 사살하지 않고 생포해 법정에 세웠어야 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미국의 전반적 여론은 크게 괘념하지 않는 듯하다. 광기와 싸우는 자리를 이성 대신 또 다른 광기가 차지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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