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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마지막 판자촌

서울에 판자촌이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생계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해 천변을 따라 긴 판자촌이 형성됐다.
맑은 물이 흐르는 천변은 가난한 사람들이 집을 뚝딱 짓고 살기에 제격이었다. 판자촌엔 잡화점, 연탄가게, 만화가게 따위가 들어섰다. 1950년대 말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된 후 박정희 정권은 이곳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고 69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로 철거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판자촌은 청계천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필자가 6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서울 서대문에도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을 따라 가정방문을 간 곳이 우리 옆동네 판자촌이었다. 필자의 집도 누옥이긴 했지만 그렇게 누추한 집은 처음 보았다. 때는 달동네란 말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 집이 꼭 천막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그 집에 전교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던 같은 반 수재 친구가 살고 있었다. 다른 얘기지만 그땐 그렇게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지금처럼 드문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판자촌 하면 그때 일이 연상되곤 한다. 

지난 주말 서울 포이동(현 개포동)에서 발생한 판자촌 화재 사건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문득 일깨워주었다. 어린이의 불장난으로 불이 나 96가구 가운데 75가구가 집을 잃은 것이 사건 개요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 이번 사고는 두말할 것 없이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포이동 판자촌 주민 역시 대부분 강제이주된 사람들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넝마주이, 도시빈민, 부랑인 등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만들었다. 포이동에 정착한 사람들은 이들 중 일부다. 이렇게 강제 정착됐건만 서울 강남구청은 이곳 주민들에게 시유지 무단점유란 이유를 들어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그게 현재 가구당 5000만~1억원을 넘는다. 

그 와중에 불이 났다. ‘불법 무단점유자’들은 그나마 비바람 피할 곳을 잃어버렸다. 구청 측은 임시대피소로 가라지만 갈 수가 없다. 마을을 비웠다간 그 틈에 판자촌을 완전히 철거해버릴까 봐서다. 할머니들은 망연자실 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다. 철거민 판자촌. 그것은 먼 과거의 풍경이 아니다. 이 시대 마지막 판자촌도 아니다. 그것은 적지 않은 우리 이웃들의 현실이다. 선진화를 외치는 우리의 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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