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적대적 공생의 고리를 끊으려면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나찰로시'란 말이 있다. 과거와 똑같은 사건이 반복될 때 "나찰로~시"라고 한다. "쯧쯧, 또 시작이군" 정도의 뜻이다. 지난달 말 남북한 사이에 포격을 주고받는 초긴장 상황이 벌어졌을 때 떠오른 게 이 말이었다. 필자의 안보의식이 허약한 탓이었을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나와 비슷한 생각도 꽤 되는 것 같다. 남북 긴장이 여전한 상태인 8월 22일 인터넷에서 이런 '예언'이 눈에 띄었다.

"북한은 원하는 대화 이끌어내고 잘하면 삥 뜯을 수도 있겠죠. 남한은 박근혜정부가 대응을 잘했다 이러면서 지지율 무너진 거 회복할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겁니다. 맨날 으르렁거리면서 표면적으로는 적대적이지만 사실은 서로 절대 전쟁을 바라지도 않고 딱히 통일을 바라지도 않는 최고의 파트너인 듯? 결국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은 나라 지키다 다리 잃은 하사와 포격으로 스트레스 받은 우리 국민들, 국군 장병들이 되겠네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최근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합의한 내용의 이행을 강조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8일 보도했다. 김 제1위원장은 또 중앙군사위 일부 위원들을 해임하고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회의에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과 총정치국,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내각 간부와 군단급 지휘관 등이 참석했다.


 

이 글은 사태의 성격과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다. 협상이 타결된 뒤엔 이런 반응도 나왔다. "다행이지만 남북한 대치가 주로 내부자를 향한 안보정치용이라는 사실이 이번에도 확인됐다는 점에서 씁쓸하기도 하다…."

실제로 '8·25 합의'에 힘입어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49%로 껑충 뛰었다. 인터넷 글의 예언대로다. 북측도 득을 본 듯하다. 김정은은 자신들이 주도해 무력충돌로 치닫던 위기를 타개해 전쟁의 먹장구름을 밀어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남과 북의 집권세력이 사이좋게 무슨 정치적 이득을 얻었는지 아닌지가 될 수 없다.

본질은 적대적 공생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당하는 건 애먼 남과 북의 시민들, 장삼이사란 사실이다. 요컨대 민생이 더욱 고달파진다는 게 본질이다. 권력을 나라와 동일시하는 선전에 세뇌되면 이게 헷갈린다.

위기로 치닫다가 일순 화해모드로 돌아서

필자 등의 덤덤한 마음은 해이한 안보관 탓이라기보다는 그간의 학습효과 덕분이다. 우리는 물리도록 보아왔다. 남과 북이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다가 일순간 화해로 돌아서는 것을. 그래서 남과 북의 적대적 공생이란 가설이 케케묵기는커녕 여전히 유효한 분석틀임을 이번에도 확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경기도 포천에서 열린 통합화력훈련을 관람하고 나서 전역연기 장병을 격려하고 있다.

 


적대하되 상대를 궤멸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않는 것, 그럼으로써 공생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 고전적 사례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뒤로 전개된 남과 북의 정세 변화다. 남한은 박정희 영구집권을 노린 10월 유신을 단행했고, 북한은 12월 주석제를 신설하는 새 헌법을 공포했다. 이 경우는 양측이 서로 으르렁대다가 화해 모드로 돌변한 것을 내부 체제 단속용으로 써먹은 것이다.

이번 남북 대치 국면에서 나는 숄로호프의 장편소설 '고요한 돈강'을 읽고 있었다. 거기서 순박한 카자크족은 러시아 혁명 후 내전에 휩쓸리면서 백위군·적위군으로 갈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다. 압도적 대다수의 카자크족은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싸워야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적대적 공생을 통해 정치·경제적 잇속을 챙기는 한 줌의 무리들 탓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남북한도 그렇다. 남북의 대다수가 평화를 갈구함에도 간헐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본다. 따라서 현재 남북관계의 기본구조인 적대적 공생이란 고리를 끊어내지 않는 한 유사한 위기 상황은 끝도 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적대적 공생을 평화적 공생 관계로 바꾸지 않는 한.

한데도 수구 언론은 이번에도 '희생 각오, 단호한 응징'을 강조하며 흡사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듯한 강경 논조를 보였다.

 

 

                                         조선일보 8월 21일자 사설

 


진짜 민주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북한의 상수(常數)적 성격을 인정하는 게 불가피한 첫걸음이라고 본다. 북한은 3대째 독재 세습체제가 이어지고 있는 특수국가·사회다. 정상적인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무늬만 사회주의 국가다. 그런 현실, 즉 남북관계의 특수성,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통일대박론 같은 비현실적 망상에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

북의 상수성을 인정한다는 건 달리 말해 남이 기꺼이 변수(變數)를 자임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즉 남쪽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비대칭성이 손해 보는 장사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궁극적으로 무늬만 민주가 아니라 진짜 민주적이고 남북문제에 대한 웅숭깊은 철학을 가진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김철웅 언론인,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2015-09-08 12:07:36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