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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뷰

[월드 리뷰] 정체성에 대한 오해

슈퍼볼 영웅 하인스 워드는 미국 땅에서 자라면서 적지 않은 냉대와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 이민자들도 어울리기를 꺼렸다. 미국이 ‘다인종 사회’라고는 하지만 워드가 오늘의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을 헤쳐야 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편으로 그의 성공담은 여전히 완고한 순혈주의와 위선적 이중성에 매몰돼 있는 한국 사회에 자성의 계기가 됐다. 그 자성은 이런 질문들로 이어진다. 우리에게는 워드 같은 혼혈인을 영웅으로 키울 역량이 없는가. 한국 사회 속의 3만5천여 혼혈인들은 어떤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또 국내 체류 외국인 70여만명 중 외국인 노동자가 33만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 대책은 있는가.

슈퍼볼 영웅 워드나 한국의 어느 평범한 혼혈인이나 공통적으로 부딪친 것은 필시 ‘정체성 혼란’의 문제였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혼혈인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은 훨씬 클 것이다. 대다수가 멸시와 따돌림을 경험했고 남자의 경우 군 입대마저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종교, 인종, 민족뿐 아니라 언어, 생활방식, 신념 등이 한데 어우러져 형성된다. 따라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쉬운 게 아니다. 정체성은 또 인간의 삶에 불가결한 요소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배타성과 독선의 문맥 속에서 쓰일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종교·인종따른 습관적 분류-

콩쿠르상 수상 작가
아민 말루프의 책 ‘사람 잡는 정체성(원제 Les Identites meurtrieres)’은 정체성의 미명 아래 저질러지고 있는 많은 갈등과 비극들을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갈등이 첨예한 사회에서는 어느 한 쪽의 정체성을 강요하거나 스스로 특정 정체성에 편입하려는 현상이 생겨난다. 이를 그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들 때문에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를 하나의 소속에만 환원시키라고 부르짖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가 정체성에 천착하게 된 것은 아랍 출신이면서 기독교도이고 모국어는 아랍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 때문이었다. 이런 체험 덕분에 그는 정체성 강요가 가져오는 폐해를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종교와 민족 정체성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내전과 인종청소였다.
저자는 비슷한 논리로 사람들이 모든 사건을 ‘이슬람’이라는 항목 아래 분류하는 습관을 반대한다. 그것들을 더 잘 설명해 주는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정체성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분류된다. 이슬람권이 가장 과격한 집단이라는 인식도 이 습관적 분류법에 따른 고정관념이다. 이런 분류법은 그럴듯 해 보인다. 금세기 들어 발생한 9·11테러, 런던 폭탄테러, 프랑스 인종폭동, 호주 인종폭동 등은 이슬람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마호메트 만평 파문이 발생했다. 덴마크 신문이 마호메트를 풍자한 만평을 실으면서 비롯된 사태가 전세계 이슬람권의 항의로 확산된 것이다. 이런 사건들로 과연 이슬람의 호전성과 과격성을 규정할 수 있는가.

이슬람의 호전성을 강조한 대표적 학자로 새뮤얼 헌팅턴을 들 수 있다. 그는 책 ‘문명의 충돌’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1,400년 역사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당하는가’라는 정치학의 핵심 문제가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이론은 그러나 문명 충돌이란 중립적 개념을 사용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양자 대립이란 분석틀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선과 악 이분법적 세계관을 연상케 한다.

-마호메트 만평 모슬렘에 폭력-

이집트의 노벨상 수상작가 나깁 마흐푸즈는 서구 언론의 마호메트 풍자 만평 게재를 ‘모든 모슬렘의 뺨을 때린 것’으로 비유했다. 그는 이 사태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호재가 될 것이며 문명간 대화와 종교간 공존을 추구해 온 온건한 모슬렘에게 큰 타격이라고 했다.

만평 사태는 전적으로 서방의 이슬람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초래한 것으로 이슬람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문명 충돌’로 오해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