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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칼자루 쥐고도 전 정권 탓이라니

이명박정권 때 ABR정서라는 게 있었다. Anything But Roh의 약자로, ‘노무현이 하던 것만 빼곤 뭐든지’란 뜻이다. 미국에 조지 W 부시정권이 들어선 뒤 전임 빌 클린턴 대통령과는 차별되는 정책을 ABC, 즉 Anything But Clinton(클린턴이 하던 것만 빼곤 뭐든지)라고 했던 것을 빗댄 말이었다.

단 두가지, 노 정권 때 시작한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건설만은 예외였다. 당시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은 두 사업이 전 정권에서 시작한 일인 만큼 민주당이 반대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바꾸기라고 공격했다. 이것은 새 정권이 전 정권이 벌인 국가적 사업을 어떤 이유에서든 승계한 사례다.

6·17 규제 소급적용 피해자 구제를 위한 모임, 임대사업자협회 추진위원회, 임대차3법 반대모임 등 3개 단체 회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파크원 빌딩 앞에서 열린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 정책 반대하는 집회에서 정부를 규탄하며 신발투척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초장기 장마로 홍수피해가 극심해지자 보수 정치인들이 슬슬 이명박정권의 4대강사업 재평가를 주장하고 나선 건 어떤가. 홍수위험이 없는 본류를 깊이 파내려가면서 홍수예방을 주장한 것 자체가 허구였다. 그럼에도 정진석 통합당 의원 등이 4대강사업의 홍수예방 효과를 이슈화하고 있다.

이상돈 전 의원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린 평가가 재미있다. “자신들의 어떤 존재의 근거를 거기다 그어놓은 것 같아요.” 2018년 감사원 감사 결과 4대강사업의 홍수피해 예방 가치가 ‘0원’이었음에도 이 사업이 치수와 홍수방지에 효과적이란 확신을 갖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부동산값 전 정권 핑계는 웃기는 일

최근 불거진 부동산값 폭등사태는 이런 사례들과는 결이 확연히 다르다. 여기서 똑 부러지는 부동산 해법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부분은 난다긴다하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집권당의 정신과 자세를 얘기하려고 한다. 여야 정치권은 이 악재의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폭등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는 이명박·박근혜정부 9년간 누적된 부양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여당의 항변에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김두관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2014년 말 새누리당이 주도해 통과시킨 부동산 3법, 이른바 ‘강남 특혜 3법’ 통과로 강남발 집값폭등은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와 박덕흠 의원의 부동산 시세차익이 각각 23억원, 73억원이라며 “자기들이 저지른 집값폭등 책임을 현 정부에 뒤집어씌우는 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송석준 통합당 부동산특위 위원장은 “이 정부 출범이 3년2개월 됐는데도 전 정권을 탓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황규환 부대변인도 “22번의 대책을 내놓고도 아직까지 전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졸속, 무능한 정책임을 자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지난 3년간 내놓은 부동산정책은 23차례였다.

더 아픈 건 우군으로 여겼던 정당과 시민단체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온다는 점이다. 주진형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은 “2014년 나온 법이 현재 부동산 폭등의 주범이라고 할 근거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경실련의 김헌동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은 집값폭등이 현 정부 탓만이 아닌 것을 인정하면서도 “집권 3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남탓을 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흔히 생각하듯 권력은 정치권력만 있는 게 아니다. 정치권력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약화했다. 이에 비해 여전히 힘센 권력은 야당권력 언론권력 재벌권력 사학권력 종교권력 등 ‘유사권력’들이다. 일부는 이 시대 청년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무기로 삼아 잃어버린 기득권 헤게모니를 되찾으려 ‘반란’을 일으킬 기세다.

야당도 낙제점이지만 더 큰 책임은 여당

그럼에도 다시 새겨야 할 것은 집권했다는 것의 의미다. 쉽게 비유하면 그건 칼자루를 쥐었다는 뜻이다. 물론 칼자루를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휘두르라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도는 처음으로 통합당에 추월당했다.

지금 여의도에는 민주당에 ‘민주가 없고’, 미래통합당의 ‘미래를 모르겠다’는 말이 돈다. 여도 야도 환골탈태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책임이 훨씬 더 막중한 것은 어디까지나 칼자루를 쥔 집권당이다. 전 정권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그런 것일까. 아서라, 정신 차리기 바란다. 2020-08-14 12:47:26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