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그래도 ‘등대지기’들이 희망이다

‘웬 등대지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등대지기는 은유다. 세상은 어지럽더라도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하며, 이웃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런 삶의 태도가 등대지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공식 명칭이 ‘등대관리원’인 등대지기는 안전한 항해를 소망하는 배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며 일년 365일 등대 불빛을 밝혀야 한다.

‘등대지기’라는 노래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이 노래를 들을 때 나는 평생 등대지기로 살다 몇해 전 작고한 후배의 부친이 떠오른다.

 

TV 뉴스를 보다 보면 “민나 도로보데쓰(모두 도둑놈이야)”란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시절이다. 일제 때 나고 교육받은 선친에게서 가끔 들었던 일본말을 쓴 걸 허용하기 바란다. 버닝썬·장자연·김학의 사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편파수사, 업소와의 유착 관계는 벌어진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하게 한다. 검찰 경찰 공히 그렇다. 그래서 혼자 이런 우문현답을 하곤 한다. 경찰과 검찰 중 누가 더 부패했을까. 정답은 “민나…”인 게 뻔한데도. 우리는 검경 종사자들 대부분은 청렴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큰 비리 사건이 터지면 이들도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다.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소방관들

우리가 부정 부패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또 대한민국은 ‘위험사회’를 넘어 초위험사회로 치닫고 있다. 갈수록 악화되는 미세먼지 문제를 보라. 5주기가 코앞인 세월호 참사는 CCTV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새롭게 제기됐다. 유족들은 CCTV를 조작한 해군과 해경, 12차례나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한 선원과 청해진 해운, 선원 조사 사실을 숨긴 국가정보원, 인양 후 세월호 선체 이상을 숨기려 한 기무사 등을 전면 재조사해야 한다 주장한다.

이미지에 클릭하면 크게 보임

 

그런데 희한한 일이 있다. 공권력이 부패했다는 비판이 드높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지탱되고 있다는 게 그렇다. 어째서일까.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등대지기’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 ‘등대지기’들 덕분이라는 말이다. 그 등대지기들은 어디에 있을까. 멀리 갈 것 없다.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평범한 민초, 장삼이사가 그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확실한 이유다.

요 며칠 엄청난 산불이 강원도 동해안을 휩쓸어 큰 피해를 낳았다. 그러나 전국에서 달려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소방관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이들은 소방관이며 동시에 이 시대의 등대지기들이다. 고생한 산림청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유석종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파출소장도 도시의 등대지기다. 그는 노인들이 앉을 수 있는 접이식 의자를 개발해 관내 횡단보도 신호등 기둥 등에 설치했다. 60개 의자는 이름하여 ‘장수의자’다. 노인들의 무단횡단이 확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는 “한명의 시민이라도 안전해지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시민의 시선에서 바라볼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10월 별세한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유족은 최근 30억원 규모의 ‘김윤식 기금’을 2022년 개관 예정인 국립한국문학관에 기부했다. 유족은 “김 선생님은 남긴 모든 것을 다 한국문학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계셨다”고 말했다. 생전 김 교수의 그 생각도 등대지기의 마음이었다고 믿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하는 사람들

‘등대지기’의 삶을 산다는 건 정치성향과는 상관이 없다. 보수나 진보의 문제 이전에 삶의 본질과 맥이 닿는 문제이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참된 보수주의자가 등대지기의 삶을 살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보수가 존엄해질 수 있는 건 보수의 최소 조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다. 이런 보수 본래의 가치관이 등대지기와 가깝다.

현실에서 등대지기는 줄고 있다. 2015년 현재 전국의 유인등대는 38개에 불과하다. 1997년엔 49개였다. 무인등대로 전환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무인등대는 시설을 자동화해 중앙에서 관리한다. 밖에서 보기에는 낭만을 간직한 유인등대가 사라져가는 것은 막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은유로서의 등대지기는 건재해야 한다. 또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2019-04-08 09:36:04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