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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객닷컴] 가짜 애국자 가려내기

10·26이라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진 날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10·26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일제의 조선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날이기도 하다. 의거를 일으킨 지 올해로 109주년이 됐다. 어제 서울 용산아트홀 대극장에서는 ‘안중근 평화음악회’가 열려 안숙선 명창 등이 공연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거는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우리 민족의 기개를 세계에 떨치며 그가 평소 주창했던 동양평화론이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많은 나라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같은 아시아 이웃나라의 악랄한 지배를 받은 건 조선이 유일했다. 이런 특이한 식민지 경험 때문에 우리는 애국자와 독립운동가를 구태여 나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는 광막한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애국이었다.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우덕순 선생, 유동하 선생이 하얼빈 의거 3일전 찍은 모습
ⓒ독립기념관

10월을 맞아 한 번쯤 옷깃을 여미고 안 의사의 정신을 기려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 쓰이는 게 있다.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안중근의사숭모회(이하 숭모회·이사장 김황식)의 아리송한 성격 때문이다. 줄곧 친일이나 독재권력 협조 논란이 빚어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왔다. 1963년 설립돼 숭모회 초대 이사장을 맡은 윤치영부터 그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창씨개명하고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해 침략 전쟁을 찬양했다. 해방 후에는 독립 유공자로 둔갑해 1982년 독립유공건국포장을 받았다.

 

2대 이사장인 시인 이은상은 친일어용신문 만선일보에서 일했고 친일 잡지 조광의 주간을 맡았다. 이후 이사장들도 대부분 권력의 양지만 좇았을 뿐 안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평가다. 정원식, 노신영, 황인성, 안응모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총리나 내무장관을 지냈다. 숭모회는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예산도 지원받고 있다.

 

다른 단체가 하나 더 있는데,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다. 기념사업회는 정부 지원은 없고 회원의 회비와 기부금, 사업 수익금이 재원이다. 이로 볼 때 숭모회는 박정희가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우파 단체이며 친일·독재에 우호적인 세력이 동원돼 지금까지 온존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글로벌화·4차산업혁명 시대라고 해서 애국심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법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애국심은 다른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 문필가 새뮤얼 존슨(1709~1784)이 했다는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란 ‘악담’은 음미할 만하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존슨이 이 말을 했다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의 전기를 쓴 동시대인 제임스 보스웰이었다. 보스웰에 따르면 존슨이 비난한 건 애국심 전반이 아니라 가짜 애국심이었다. 사전 편찬자이기도 했던 존슨도 자신이 만든 영어사전에 ‘애국자’에 대해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애국자를 자처하면서 당파적 분란만 일으키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존슨이 뭘 말하려 했는지 감이 잡힌다.

 

존슨의 가짜 애국자론이 딱 들어맞는 사례가 이곳에서 드러났다. 정부는 지난 8월 27일자 관보를 통해 가짜 독립운동가로 의심받아온 고 김정수 등 4명의 공적이 거짓으로 드러났다며 서훈을 취소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위치한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의 묘(181번 묘) /오마이뉴스

 

그러나 가짜 의혹이 제기된 지 20년 세월이 흐른 뒤였다. 독립운동가 김진성(1914~1961) 선생의 아들 세걸씨(71)가 아버지의 공적을 가로채 보훈연금 등 혜택을 누린 가짜 독립운동가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훈처에 항의한 게 1998년 4월의 일이었다. 이에 따라 그 해 7월 서울 현충원에 있던 가짜 김진성의 묘는 파묘되고 그 자리에 부친의 유해가 이장됐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를 덮을 수 없던 세걸씨는 가짜 김진성과 사촌형제 간인 김정수에 대해서도 가짜 독립운동가 의혹을 제기했다. 김정수의 묘역은 파묘된 김진성 묘역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보훈처 담당 공무원은 늘 ‘검토 중’이라며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다는 것이다.

 

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사망한 독립유공자는 1만4766명인데 이 가운데 3895명이 국립묘지에 묻혀있고 2460명이 국립묘지 밖에 묻혀있다.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57%(8411명)의 묘역이 소재불명 또는 미확인 묘역이다. 독립유공자 묘역이 절반도 넘게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투쟁을 하면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후손이 끊어진 경우가 많다. 소재불명이나 미확인 묘역이 다수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짜와 가짜 애국심, 애국자들을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소나 개나 애국을 부르짖는 세상에서는 특히 그렇다.

2018.10.11 0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