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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위태로운 민주주의,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곳에서 시차를 두고 열린 행사 두 개로 시작하자. 장소는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이었고, 두 행사 모두 민주주의와 직결된 것이었다. 독립공원이 생소하다면 서대문 형무소 자리 하면 단박에 알아들을 거다. 독립공원은 1987년까지 서대문 형무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됐다.


 지난 11일 이곳에서 ‘갑오년 새해, 민주주의를 구하라’는 이름의 시국대회가 열렸다. 요즘 시국 집회가 흔하지만 이날 모임엔 특색이 있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의 중장년층 시민들이 새해 첫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여기엔 1만3451명이 연명했다. 이철 전 코레일 사장, 원혜영 민주당 의원 등 유신시절 민주화 운동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나왔다. 20여개 대학 민주동문회 회원 등 500명 가량이 모였다.


 왜 모였나. ‘민주주의를 구하라’는 대회 이름대로다. 민주주의의 위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국선언에서 “수많은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지켜왔던 민주 정통성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했다. 또 “이 참담한 민주파괴 현실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성명은 끝에 “유신독재정권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착각마저 든다”고 썼다. 이 시대에 ‘유신독재정권의 망령’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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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갑오년 새해, 민주주의를 구하라’는 시국대회를 연  대학

민주동문회 회원 등이 서울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지난해 5월 24일 독립공원 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이름하여 ‘10·26 의인들 33주기 합동추모식’이 열렸다. 1979년 10·26 때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 부하 등 6명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왜 여기서 열었나. 1980년 5월 24일 이들의 교수형이 집행된 곳이다. 현역 대령이었던 김재규의 수행비서관 박흥주만 단심이 적용돼 이보다 앞서 3월 6일 총살형됐다.


 두 행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에 말했듯 둘 다 민주주의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민주화 세대가 볼 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다. 시국선언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은 박근혜 정권이 쉴 새 없이 저지르고 있는 민주파괴, 공약파기, 민생파탄의 만행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데 김재규가 저지른 10·26은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굉장히 있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이며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9년 12월 18일 법정 최후진술 등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래서 “야수와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와 대결하려면 더 철저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독재를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는 소신도 피력했다.


 이 글은 김재규를 재평가하려는 목적이 아니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김재규가 당시 군검찰 기소 내용이나 세간의 추측대로 정권욕에 사로잡혀 ‘대역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란 점이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나름의 소신과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의 소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유신은 민주주의와 상극이다. 유신체제를 끝내기 위해서는 접근이 쉬운 내가 박정희를 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집권을 하면 또 다른 군부독재가 되기 때문에 집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나는 기쁘게 가니 국민 여러분은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고 편안히 사시라….”


 그러나 오늘의 정치현실은 그의 바람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 그가 사망한지 33년 세월이 흘렀건만 유신시대 민주화 투쟁을 한 인사들이 유신독재의 망령 부활을 탄식하는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쉽게 민주화를 입에 올린다. 하지만 지난 시절 어떻게 이룩한 민주화던가. 유신 시절 김지하는 피를 토하듯 ‘타는 목마름으로’를 노래했다. 그 목마름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신새벽의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일러스트 권신아

 

 

 두어달 전 나온 김재규 평전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박근혜 시대에 다시 읽는 김재규다. 작가 문영심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지금 김재규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이유는 유신의 악몽이 우리 머리 위에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박근혜 정권은 여러가지 점에서 유신의 망령,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그 진상 은폐 축소 조작,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무단 공개, 검찰총장과 검찰 특별수사팀장 찍어내기, 민노총 침탈 등 노동기본권 유린, 공영방송 장악을 통한 여론조작, 기초노인연금 등 대선공약 파기, 수서발 KTX주식회사 설립 강행…. 40년 전 유신 때 등장했던 국사 국정교과서를 부활시키려 한다. 거기에다 대통령은 “과거 불법으로 떼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건 소통이 아니다”며 불통정치를 계속 할 태세다.


 이런 일들을 유신 시절과 연결짓는 건 자연스럽다. 반민주성에 있어서 전임 이명박 정권과 초록동색이란 이유로 박근혜 정부를 ‘이명박 정권 6년차’라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순진한 생각이다. 박근혜에게는 독재의 원체험, 바로 박정희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3월 쓴 ‘유전자 정권’이란 칼럼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전자가 이 정권의 성격과 정체성을 두고두고 규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테면 독재의 유전자 같은 것 말이다. 설마 했지만 1년도 채 안 지나 그 우려는 사실로 판명나고 있다. 정권에 유신독재의 원체험이 있다면, 그 반복도 별로 거리낄 게 없는 일이 된다. 더욱이 그 때를 미화하고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유신공주’가 대권을 잡고 있는 마당이다.


 주요 대선공약들을 거의 다 파기한 박근혜 정권의 기만성도 태생적인 것으로 본다. 박정희는 유신을 한다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대사기를 쳤다. 일찌기 정치학자 전인권 교수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박정희를 몰(沒)민주주의자 또는 무(無)민주주의자로 규정했다. 박근혜는 그런 부친을 지금도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로 존숭한다.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적었던 박근혜가 그 소중함을 알리라 기대하기도 어려운 이유다.


 따라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4년 중임 또는 내각제 개헌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제도적 측면이다. 더욱 본질적이고 절실한 건 시민들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각하고 비판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아파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정치개혁·정권교체 열망도 더 힘을 얻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두번째 민주화’의 역설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