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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일관성과 변절 사이 


박정희는 변신의 귀재였다. 일제 때 창씨개명도 두 차례나 했다. 1940년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였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일제 만주군으로 복무하다 귀국 후 육군 장교가 돼 남로당에 비밀 가입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을 군 특무대에 실토해 살아남았다.



박정희의 처신은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특출나게 변화무쌍한 것이지만, 누구나 어느 정도씩 소신과 생각을 바꾸며 살아간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다. 엄밀하게 말해 초지일관한 삶이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람의 일관성엔 벗어나도 되는 허용치란 게 있을까.

변신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장 나쁜 것은 변절이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잇속을 좇아 왔다갔다 기회주의적으로 지조를 내던지는 행위가 변신 중 하지하인 것은 분명하다.
또 전향이란 것이 있다. 사상전향이건 정치적 전향이건 그것을 변절과 구별시키는 요체는 그 진정성이라고 본다. 몇 년 전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빠졌다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의 품으로 전향을 선언하고, 일부는 그 경험을 살려 남한에서 암약한다는 종북좌파의 ‘적출’에 나서기도 했다고 한다. 문제는 겉멋을 넘어서는 진정성 여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모 아니면 도’인 것은 아니다. 일관성을 잃었다고 해서 그게 곧 변절이 아닌 경우도 있다. 작금 한·미 FTA 비준 문제를 놓고 한나라당은 애당초 노무현 정권이 시작한 일임을 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가령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당시엔 한·미 FTA를 좋게 평가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일관성과 변절 사이에 매우 폭넓은 공간이 존재한다고 본다. 상황 변화에 따라 시각과 정견을 수정하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용기다.
처음 잘못 판단한 게 칭찬할 일은 못될지언정 미국이 했으니 끝까지 가야 한다는 논리보다는 백배 낫다. 그런 걸 일컬어 수구 꼴통짓이라 한다. 책임 정당이 잇속 따라 입장을 바꾸는 기회주의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고. 안심하시라. 그건 눈이 밝은 국민이 처리·심판해 주게 돼 있다.

[관련글]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2007년 시사자키 인터뷰 전문
"한미 FTA, 한국 사법주권 전체를 미국에 바친 것... 이런 협상은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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