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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학벌이란 노비문서

현실에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가설이 신통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다. 역사반복론은 단순화의 흠은 있지만 명쾌하게 현실을 설명해주는 힘이 있다는 게 미덕이다. 여기에 역사가 ‘처음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주석까지 곁들이면 역사반복론은 더욱 그럴듯한 설명력을 갖게 된다.

이제 “현대에도 조선시대와 비슷한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학벌주의다”라는 가설을 세워보자. 그것이 현실 사회 분석에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가설의 검증은 어렵지 않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옛날 노비문서 또는 공명첩(空名帖) 구실을 하는 것이 대학 졸업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 어려서부터 안간힘을 써야 한다. 안 그러면 평생 낙오자란 인식이 넓게 퍼져 있다. 좋은 졸업장이 좋은 직장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이게 내 대에서 끝나는 문제도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건 옛말이다. 부와 학력의 대물림 현상이 갈수록 뚜렷하다. 이만큼 확실하게 한국이 전근대적 신분사회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없다.

조선시대 반상제도의 데자뷰

드라마 추노 /경향신문DB


드라마 <추노>를 보셨는가. 좋은 드라마다. 조선시대 신분제의 질곡을 정면으로 응시한 드라마가 없었다는 점에서다. 노비들은 주인 맘대로 매매·상속·증여됐다. 주인은 어떤 형벌도 가할 수 있었고 죽이는 경우에만 관청에 보고했다. 이런 노비가 인구의 3분의 1을 넘었다. 우리들 족보를 보면 모두 양반 후손으로 돼 있지만 아니다. 셋 중 하나 또는 둘은 노비의 후손이란 분석이 있다. 이 불일치엔 매관매직을 합리화한 공명첩도 한몫 했을 것이다. <추노>엔 난을 일으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유롭게 살기를 꿈꾸는 노비들이 나온다.
그러나 반상(班常) 신분제도를 뒤집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이야말로 양반들이 기득권을 대대손손 이어가기 위한 유일한 장치였거늘.

학벌주의에서 옛날 반상제도의 데자뷰를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졸업장은 노비문서 못지않은 위력을 평생 발휘한다. 실력보다는 졸업장이 먼저다. 서울과 지방, 수도와 수도권, 일류대와 비일류대가 차별된다. 일류대도 또 층이 나뉜다. 이런 서열구조의 상층부를 차지하지 못한 대다수 학생들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세태를 어떤 개그맨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풍자한다. 우리는 웃지만 그 웃음 뒤엔 씁쓸함이 남는다. 학벌주의가 더욱 강고하게 사회를, 젊은이들을 옭아맬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학벌주의로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이 수월성이니 뭐니 말을 늘어놓지만 그것은 결국 기득권 유지 장치 강화와 차별을 위한 궁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김예슬씨 /경향신문DB


학벌주의란 현대의 신분제도를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지난 겨울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과거 선수들의 엄숙주의를 벗어나 발랄하고 유쾌했다. 이들은 서울 올림픽 전후에 태어난 자유로운 세대란 뜻에서 ‘88세대’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꿈을 이룬 극소수의 청춘이다. 동세대의 보편적 삶과 정서를 대변한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다.
그보다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쓰고 학교를 떠난 고려대생 김예슬씨를 주목한다. 나는 학벌주의와 배울 것 없는 대학교육을 비판하며 자퇴한 그의 행동이 숨막히는 신분체제로부터의 용기있는 탈주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특별한 젊은이였다. 많은 학생들이 공감했지만 동반 자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학은 나와야지”란 현실론의 무게 때문이다. 이들에겐 등록금 마련과 취업경쟁이 초미의 관심사인 것이다.

대물림 현상 갈수록 뚜렷해져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 vs 철학>에서 조선시대 전근대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두 가지뿐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운 좋게도 양반의 집에서 태어났는가, 아니면 불행하게도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났는가”이다. 또 하나는 남성 또는 여성으로 태어났는가이다. 그는 이런 삶의 조건에 지배되는 사회는 결코 윤리적인 사회라고 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 정권은 학벌주의란 측면에서도 어김없이 고속 역주행하고 있다. 신분상승의 첩경이 학벌이란 생각이 사라지지 않으면 단언컨대 사회 발전은 없다.